[TE머묾] 봄에, 기사 쓰기 싫어 쓰는 방어벽 관련 썰

[TE머묾] 봄에, 기사 쓰기 싫어 쓰는 방어벽 관련 썰
Photo by Tatiana Rodriguez / Unsplash
💡
Editor's Pick
- 기사 쓰고 앉았기 억울할 정도로 날씨가 좋아서
- 마침 봄마다 생각나는 노래도 한 곡 있어서
- '보안'과 '벽'을 억지로 이으면 이을 수도 있겠다 싶어서

1.

우린 겨우내 탐색전을 벌였고, 봄부터 연애했다. 365일 동안 365번 만났고, 두 번째 봄이 끝나자마자 결혼했다. 연애 기간 유일하게 두 번 지낸 계절은 우리의 상징이 됐다. 하나씩 늘어나는 아이들까지 데리고 해마다 봄꽃을 구경했으나, 결혼 15년 차에 드디어 기록이 깨졌다. 첫 주말 부부 생활이 시작된 때문이다. 나는 여의도에서, 아내와 꼬마 셋은 집에서 갑자기 멀어진 서로의 봄에 애를 태웠다. 그 해 난 여의도 한강공원의 봄 나들이 인파에 섞여들지 않았다. 집에 내려갈 생각만 가득했다.

주중 혼자 지내는 광흥창 작은 방에도 봄기운을 부러 들이지 않았다. 문 꼭 잠근 채 맨손체조하고 못다 한 글을 쓰고 식구들과 영상통화를 하면, 그게 내 봄이었다. 새 학기에 해빙한 젊은이들 목소리가 이따금씩 창문을 두드리면, 난 15년 전 아내를 떠올렸다. 청년의 서슬이 그토록 퍼랬는데, 고양이 발톱처럼 잘도 감추고 있었던 우리를 기특해했다. 15년 정도 지나니 그 발톱은 무뎌져 있었고, 이제 우리는 아무것도 감추지 않은 손을 잡을 수 있다,는 사실에 혼자 웃었다. 그게 내 봄이었다. 지난 15년이 내내 봄이었다.

2.

이른 봄이 가져다주는 묘한 흥분감을 나는 사랑한다. 그게 일반 대중들 사이에 조용히 벚빛으로 휘몰아칠 때, 나는 깊이 공감한다. 사람이나 관계, 날씨를 비롯해 모든 주변 것들에 큰 애정을 느끼지 못하는 나 같은 사람에게 이는 매년 낯선 감정이다. 계절의 변화에 씰룩거리는 심장 한 구석이, 희미하게 홍조 띤 사람들을 관찰하는 내 시선이, 그럴 때 나도 모르게 떠오르는 ‘공감’이라는 단어가, 적잖이 어색하다. 그럴 때마다 내게 잔재처럼 남아있는 마음속 벽이 상기된다. 아직 제 기능을 발휘하고 있구나.

아내는 벽에 구멍을 뚫고, 그 구멍을 비집고 들어오는 사람이다. 시간이 얼마나 걸리든 해낸다. 나는 그 누구라도 벽 너머에 두고 관계를 이어간다. 사람마다 벽 두께를 달리할지언정, 아무도 벽 안으로 들어오지 못하게 막는다. 그걸 처음 깨부수고 들어온 게 아내였다,라고 서술하면 악성 클리셰가 돼서였을까. 시작 단계서 우리는 공수를 교대했다. 나는 아내에게 ‘상종 못할 인간’이었고, 나는 그걸 어떻게든 타개하려 했다. 나는 벽을 넘어가 맹공을 퍼부었고, 아내는 드릴 대신 서툰 방패를 들었다. 방어선은 조금씩 뒤로 밀렸다. 하지만 수백 번을 결혼하자고 졸라도 확답 없던 아내와 어떻게 버진로드를 같이 걷게 된 건지, 이제와서는 구체적인 기억이 없다. 다만 그 길을 왕복했을 때, 우리는 본래의 성향으로 회귀했다. 나는 벽공으로, 아내는 천공으로.

지금까지도 둘은 그렇게 남아 있다. 하지만 내 벽은 물렁해졌다. 아내가 공들여 뚫어놓은 구멍들로 아이들이 끝없이 드나드는 통에 견고함이라고는 흔적조차 없다. 신기하게도 가족 외 다른 사람들 앞에서는 -그게 벚꽃 앞에 행복한 표정 짓는 이라 할지라도 - 물 샐 틈 없는 벽이 순식간에 완공되는데, 집 문만 들어서면 그 성벽 같던 것이 달군 프라이팬 위 버터처럼 녹아내렸다. ‘아내가 공들여 뚫어놓은’이 중요한 대목이다. 무슨 피도 눈물도 없는 냉혈한의 가슴에 사랑의 꽃이 따스하게 피어나고, 얼음에 갇혀 있던 생명수가 온천이 되어 만인의 체온을 아름답게 높여주는, 그런 식의 전개가 아니다. 나의 녹아남은 철저하게 학습된 거라는 거다. 자동반사처럼.

3.

‘사랑하게 될 줄 알았어’
지금도 이 노래가 신효범의 목소리로 머리에서 재생된다. 아내에 대해 쓰고 있기 때문이다. 이 노래를 듣고 아내를 만났는지, 아내라는 사람을 알고 이 노래를 접했는지, 헷갈린다. 중요하지 않다는 뜻이다. 저 구절을 누군가 저 문장으로 구성해 노래했고, 동시대에 나와 아내가 그 가사를 실제로 살아냈던 기억을 가지고 노래와 함께 늙어간다는 것으로 충분하다. 물론 아내가 저 노래를 아는지, 저 후렴구를 들을 때 나를 떠올리는지는 알 수 없다. 아마 죽을 때까지 모를 것이고, 나도 굳이 말해주지 않을 것이다. ‘이 노래 들을 때마다 당신 생각해’라니, 모양 빠진다.

난 정말 사랑하게 될 줄 알았다. 제법 큰 교회 모임에 늦게 나타난 아내가 맨 뒷줄에 착석해 컵라면을 진공청소기처럼 흡입할 때 나 혼자 은밀하게 그랬다. 맛집 소개해 준다며 아무 특징 없는 분식집에 데려가 놓고, 왜 맛있다는 걸 표현하지 않느냐고 적반하장으로 굴 때 그랬다. 너무나 대범하게 화장기 하나 없는 얼굴로 나타나 서울 시내를 나와 싸돌아다니던 오후에도 그랬고, 식당 반찬 보고 ‘조그마해’를 ‘재끄매’로 발음할 때마다 그랬다. 관계가 무르익은 줄 알고 손 잡기를 시도했다가 거부당한 첫 번째 봄에도, 난 사랑할 줄 알았기에 창피하지 않았다. 난 그냥 우리 미래를 알았다. 우리의 첫 해, 모든 계절이 그 앎으로 관통됐다.

그렇게 다 예측했지만, 결혼 후 내가 본능처럼 세우는 벽들 역시 끊임없이 관통될 줄은 몰랐다. 아니, 내가 그렇게까지 필사적으로 벽을 고집할 줄을 몰랐다는 게 더 맞는 표현이겠다. ‘본능처럼’이 중요한 대목이다. 사랑하게 될 줄 알았던 대상자가 줄기차게 벽을 두드리는데, 내가 의식적으로 방어기제를 발동할리 만무했다는 뜻이다. 나의 천공을 만나기 전의 세월 동안 내재화 된 태도를 나도 내 힘으로 어찌할 수 없었을 뿐이다. 물론 그게 의식에서 비롯됐든 무의식에서 나오는 것이든, 뚫는 사람 입장에서야 같은 벽이었을 테지만. 원인 제공자이자 뚫리는 입장에서도 그녀의 서슬은 한결같이 퍼렜다.

4.

뚫고 버티는 시간이 지나면 발밑에 부스러기들이 남았다. 벽의 없어진 부분들과 드릴이 깎아놓은 제살들이었다. 우리는 쭈그리고 앉아 그것들을 그러모았다. 아내는 내 파편들로 자기 벽을 만들기 시작했고, 나는 철가루를 비벼대며 내 손에 생채기를 냈다. 아내가 벽 안쪽의 안락함을 알아감에 따라 나를 공략하는 방법과 횟수가 달라졌다. 나는 상처 난 손을 가지고 예전 같은 벽을 쌓을 수 없었다. 서로를 완전히 인정하는 것도, 부둥켜안는 것도 아닌데, 그렇다고 처절한 전쟁을 벌이는 것도 아닌 채, 우리만의 닮아가는(혹은 닳아가는) 과정이 그렇게 진행됐다.

그 모든 시간 속에서 신효범의 노래는 나에게 오직 아내만 떠올리게 했다. 드릴공과 벽이 내는 굉음이, 반드시 통곡을 닮은 건 아니었다. 미칠 듯이 아파도, 내 손이 쇠와 피로 범벅이 되어도, 내 그때의 예측은 엇나간 적 없었다. 사랑할 줄을 미리 안 사람의 마음이 음악 저작권보다 분명하게 우리 안에 있었다. 적응과 적응의 시간이 반복되고 있을 뿐, 사랑이라는 것도 깊어지려면 훈련의 과정을 필요로 하는 것일 뿐이었다. 우린 그저 또 다른 모양의 수험생이었다.

그렇게 우리 젊었던 고양이 발톱은 숨길 필요 없을 정도로 뭉툭해져가고 있다. 난 이제 그게 진득한 수험의 효과처럼 자랑스럽다. 눈에 보이는 성과만큼 사람 단순히 기쁘게 하는 게 없다. 그 기쁨을 알게 될수록 나는 식구들 앞에서 벽을 자동반사로 녹여내는 데 주저함이 사라진다. 특히 봄이 되면 더 그렇다. 내게 없는 공감력이 모처럼 찾아오는 계절이라 그런지, 미래를 잠시 확신했던 내 과거의 혈기가 새록히 떠올라서인지, 사랑하게 될 줄 알았어라는 곡이 이 계절에 발매돼서인지, 나는 이유를 추적 중이다.

5.

요즘은 봄보다 주말이다. 사랑하게 될 줄 알았어,라고 말해 줄 존재가 넷이나 터미널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고속버스 예매를 마치면 설렘에 잠도 오지 않는다. 우리 닮은 노래를 흥얼거리면서 난 이르게 녹아버린 버터가 돼 독방을 흥건히 채운다.🆃🆃🅔

by 문가용 기자(anotherphase@thetechedge.a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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